어쩌다 – 내가 걷는길

초가을까지도 얼굴을 내밀며 비치던 푸루스름한 새벽 빛은 이제 완연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저 밤과 아침을 알게 하는 것 은 불 꺼진 강 건너 옥수동에 짙게 깔린 고요한 밤과 , 어둠 속에서 이불을 걷고 새로운 날을 맞는 나의 느린 걸음 걸이 뿐 이다. 깜깜한 겨울 새벽이 한발짝 더 가까이 온 만큼, 여름날의 가벼웠던 아침의 활기 역시 몸 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오늘의 하늘은 6시 50분이 되어서야 그 푸른빛을 띄운다. 나도 이제서야 눈에 글이 보이고, 조금씩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채워져가는 올림픽대로가 보인다.

정신 없이 사는 나의 11월, 많은 것 이 뒤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삶과 그리 큰 변화 없이 살아가지만, 아주 작은 곳에서 생각치 못했던 활기를 찾는다. 14년만에 보내는 서울에서의 시간이 감사한 것 은, 중,고등학생때의 치열했던 삶을 다시한번 같은 곳을 밟아가며, 같은 조바심과 기대를 안으며 살고 있다는 것 이다. 영영 떠나서 그 때의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 이라 생각했던 아쉬움을 어쩌다 나를 찾아온 매일의 기쁨으로 채워간다. 핸드폰도 집에 두고 그저 정신 없이 피아노 책과 컴퓨터만 들고 돌아다니기 일쑤지만, 이 또한 중, 고등학교때와 비슷하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모두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은 다 알 수 있기에..

나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중, 고등학교때 반 정신을 놓은 채 살았다. 밤과 아침의 경계 없이, 오늘과 내일의 큰 차이 없이 그저 연습하고, 공부하고, 레슨 받으며 지내었다. 열심히 하는 보통 수준의 나를 그 시대의 음악 교육에 필요했던 모든 것을 누리게 하려 밤 낮 가리지 않고 나를 데리고 다니던 40대 우리 엄마의 모습이 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감에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지어진다. 그때의 어렴풋한 기억 속 한 없이 개구졌던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엄마가 잠시 바쁜 틈을 타 친구들이랑 조금이라도 더 놀아보려고 기차역을 돌고 돌다 엉뚱한 곳 에 내리고, 라디오가 듣고 싶어 밤 12시만 되면 연습하다 말고 워크맨을 몰래켜고, 언니들과 연습실에서 컵라면 한개를 국물 한방울 남김 없이 나누어 먹으며 끝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선생님 레슨실 앞에서 한시간이 지나도록 벽에 머리를 대고 개운한 잠 자기도 했다. 결국 그 대가로 눈물 콧물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게도 착하고 여리던 엄마가 한손에 슬리퍼를 놓지 못한 채 나를 쫓아다닐 수 밖에 없던 일들이 꽤나 많다.


중학교때 다니던 연습실과 녹음실을 14년이 지난 오늘도 다니고 있다. 오랜만에 뵌 녹음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화들짝 놀라셨고, “녹화하는 옆 모습이 초등학교때의 모습 그대로다” 하시며 껄껄대며 웃으신다. 혼자만의 녹음을 끝내고 공부하러 가는 길을 걸으며 예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이 길을 혼자 걸어보는게 그렇게 간절한 소원이었는데..” 늘 차 안에서만 바라보던 “어른되면 걷는 길” 을 수 많은 인파 속 하나가 되어 매일을 걷게 되다니.. 한국에 오래 있게 되니, 바쁜 일상 속에 숨겨졌던 꿈도 함께 이루고 있었다. 짧은 동선 안에서도 나의 내일로 가득 채웠던 그 길을 매일을 걸으며 현실을 마주하는 오늘의 “중학생 로망 속 어른 한선미” 의 모습은 영 볼품 없지만, 오래 전 시간의 길을 함께 걷는 것 만 같은 기쁨과 어린 마음의 성취감이 가득하다.

중학생 시절 내 마음처럼, 지금 이 길을 걸으며 “멋진 모습” 을 꿈 꾸고 있다. 산 더미 같은 일을 눈 앞에 두고 한숨이 쉬어지지만, 내가 내 자신을 속인채 미쳐 살아가는 꿈 없이 이 모든 일을 마주할 수 있을 용기가 없다. 꿈에 몸을 싣고 살아가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웃음 지을 날이 꼭 올 것 이다. 어렸을 적 그리던 내 로망과는 많이 달라진 키 작고 후덕한 어른의 모습이지만, 이런들 또 어떠하며 저런들 또 어떠하리.. 한 길을 걸어왔고, 소원 속 그 길 바쁜 숨 몰아쉬며 걷고 있고, 같은 꿈 안고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것 이 오늘의 내 고통을 경감해주는 위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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