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만에 맞아보는 한국의 가을 밤공기는 벌써부터 참 차다.
피아노 방 책상에 앉아서 썩 찬느낌인 밤공기를 맞다보니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뒤로하고 내 삶의 또다른 시작을 향한 긴 여행이 일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괜시리 한동안 멈춰왔던 생각이 많아지고 바빠진다. 제발 이번만은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는 지금 이런 생각들이 나를 저 밑으로 끌어내리지 않기를.. 오늘 철야의 시작이 되어버린 이 생각과 되내임과 기도 끝에 감사함이 나를 위로해주길..
이런 저런 생각을 엮어보기도 하고 또 다른 생각을 붙이기도 했다가 또 비우고 계속해서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을 반기고 또 엮고 돌려도 보고 뒤집어도 보았다가 다시 들여다보고 그 뒤로 끊임 없이 밀려들어오는 생각들 하나하나를 반복 또 반복하며 반기고 또 생각하고. 지금 이 밤에 맞는 현상이 과연 내가 지난 3년 간 밤낮으로 싸워왔던 두려움과 하루하루를 채워왔던 걱정의 연속일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내가 엮어보고 풀어내는 생각들은 이전에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보다는 고요하고 담담한 걸음과도 같이 느껴진다.
타의로 또 자의로 내 자신을 잃을 것 없는 온실속 행복한 화초라고 불러왔고 또 불려왔고 — 이를 비롯해서 이뤄진 나의 이미지와 그와 맞는 행동과 감정표현이 당연했던 어느날 나는 그런 내 모습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 벅찬 감사함도 모자랄 판에 뜬금없이 배부른 물음표라 하더라도. 내 삶의 길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하더라도.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새로운 길을 향해서 두려움을 넘어선 아무런 거리낌 없는 도전으로 발을 내딛었더라 하더라도. 그렇게 틀어져버린 그 길이 나도 모르게 원래 주어져있던 길인 마냥 걷다가 막상 걷다보니 괜시리 어제의 두려움이 몰려왔다하더라도. 아무리 그러했다 하더라도. 무언가에 홀린듯 마치 이건 내 모습이 아니라며. 지금 나는 내가 아니라며. 왜 내가 이렇게 되었냐며 묻게 되었다. 그렇게 생겨나버린 반항어린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마음. 마음 속에 꼬깃꼬깃 숨겨왔던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다 쏟아 부어내고 괜히 억울한 마음도 가져봤다가 괜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반항도 해보았다가 얼굴을 한 없이 구겨보 보고 모두를 원망도 해보기도 했다. 처음으로. 24년만에 처음으로 느낀 이 감정은 나를 유난히도 힘들게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리석었기에..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감정을 대하고 나아가는 방법을 너무나도 몰랐기에. 적지 않게 당황했기에, 그리고 어렸기에 나의 “반항”이 어찌나 커 보였는지 모른다. 내 자신에게도. 아마도 다른 이들에게도.
20대 중반의 충격의 여파로 시작된 내 짧은 사춘기는 참 가슴아프고 강렬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은 나는 강심장이 아님을 증명한다. 누구에게 화풀이 할 방법이 없어서 근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에게 내 감정을 호소하고파 했다.
엄마, 왜 나를 곱게 키웠냐며. 별로 음악을 잘 하지도 못하는 내가 뭐 이쁘다고 도와줬냐며. 왜 나를 믿었냐며. 나를 왜 자랑스러워했냐며. 아니면 왜 나를 그렇게도 가둬놨냐며. 나를 왜 이 자리까지 세워놓았냐며.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굳게 닫아버린 내 마음 알면서도 왜 내 손을 잡고 그 세상속으로 계속 이끌었냐며. 왜 자꾸 내 등을 감싸고 모든 걸 함께 하려 했냐며. 엄마의 기도를 보고있노라면 곧 내가 원하는 그 기도가 아니라며. 그렇게 기도로 또 사랑으로 키워온 나는 다 커버렸는데 왜 막상 나는 할 줄 아는 것 도 없냐며. 이게 다 온실 속 화초처럼 누군가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찾아와서 주는 물을 받아먹고 세심하게 맞춰주는 온도에 감사해하며 끊임없는 보호아래 멍하니 머리 위를 내리쬐는 해를 바라보며 살게 한 엄마랑 아빠때문이라며. 내가 뭐라고 이리도 사랑하고. 이리도 보호하고. 어쩌면 나보다 더 아파하고. 나보다 더 아파한 밤들이 많았냐며.
사실 나는 이 말을 엄마에게 할 수 없었다.
첫번째 이유는 이런 내 반항 가득한 말들은 결코 진심이 아님을 나도 잘 알고 있었고, 두번째 이유는 그렇게 반항기가 부글부글 끓면서도 부동하지 않는 내 삶의 믿음과 감사함 하나는 어리숙하고 부족하고 또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나마 살 수 있었고 사랑을 받고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가 25년동안 내게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순간순간을 느끼게 해주었던 극진하고 따뜻한 사랑과 매일밤 잠 못 이루는 기도가 나를 붙들었음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3월 오디션이 끝나고 1주일동안 바쁘게 하지만 최근 몇년 간 가장 행복하게 엄마와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엄마를 한국으로 보냈다.
뉴욕에서의 생활 7년동안 엄마가 나를 보러 오고 다시 또 한국으로 가는 일들은 항상 변함없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늘 같은 마음이였다. “곧 또 보니까..” “내가 또 보러갈껀데 뭐..” 그래서 엄마가 떠나는 날 밤이면 조금은 쓸쓸했지만 그래도 “또 봐 엄마~” 라는 말로 웃으면서 보내곤 했다.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있음을 알기라도 했던 걸까.. 늘 그래왔던 것 처럼 한국으로 떠나는 엄마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이번 3월초의 밤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정말 많이 가슴이 아팠고. 전하지 못한 말들도 너무 많았다.
오빠랑 아빠를 집에 두고 나 보러 오느라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예민한 성격에, 밤마다 걱정하는 나를 보면서도 묵묵히 밥해주고 반찬 만들어주느라 너무 수고했다. 하루종일 내가 학교에서 오길 기다리며 기도하고 긴 하루를 끝내고 지쳐 돌아온 나를 격려하며 기도하고 또 말 없이 잠들어 버린 나를 보며 또 기도하느라 너무 수고했다. 끼니 거르면 안된다며 아침 일찍부터 김치찌개를 끓이고 학교에서 챙겨 먹으라며 점심 간식을 따로 만들어 내 가방 책들 위에 차곡 차곡 쌓고 날씨가 춥다며 장갑을 겉옷 주머니에 한쪽 씩 찔러주고 한국에서 가져온 핫팩 덩어리를 흔들어 손에 꽉 쥐어주며 열심히 하고 오라는 엄마의 아침 목소리가 너무 고맙다. 영어 한마디 쉽게 못 뱉어도 나를 위해 한인타운에 지하철 타고 가서 장봐오느라 수고했다. 은행일도 챙겨주느라 수고했다. 나도 없고 컴퓨터도 고장난 아파트에서 하루종일 그렇게 성경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엄마한테 너무 미안했다. 오디션이 끝나고 주어진 조금은 여유로운 6일이라는 시간동안 여기저기 가보자는 나를 달래며 엄마는 다른 곳 안가봐도 된다며 나 필요한 거 없냐며 그저 나 먼저 생각하는 엄마가 괜히 나를 더 힘빠지게 했다. 긴장 풀려 웃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더 편안해진 엄마의 미소 뒤에 가려진 외롭고 고단한 엄마의 모습이 나를 너무 가슴아프게 했다. 짐 싸는 일에는 워낙 익숙하지만 괜시리 마지막 날 밤 짐을 싸는 엄마의 뒷모습은 연신 내 자신을 원망만 하게 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엄마가..” 우리 엄마 더 행복해야 하는데. 우리 엄마 고생 그만 시켜야 하는데. 우리 엄마 더 웃어야 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 꼭 지키고 싶은데. 괜히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이 원망스럽고. 유난스러운 내 삶이 엄마를 더욱 고단하게 한 것 만 같고. 힘들때마다 부어오르는 두 다리와 팔 그리고 딱딱해져버린 어깨. 손힘이 대단한 나도 주무르기 힘들만큼 커져버린 엄마의 무거운 어깨와 굳어져버린 아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얇은 발목과 발을 뒤덮은 굳은 살. 공항 가기 전까지 내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남아있는 나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놓는 엄마를 말리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당연시 지켜만 봐오던 “엄마가 하는 일”을 차마 건드릴 수 없었기에.. 말려도 계속 하는 엄마를 잘 알았기에.. 더 많은 “엄마가 하는 일”이 있었을텐데 내 삶이 “엄마의 일”을 마치 이렇게 쥐어준 것 만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아리고.. 더 행복하고 더 편한 “엄마가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내가 “엄마가 하는 일”을 미술학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수업 준비가 아닌 음악을 하는 딸을 뒷바라지 하는 외로운 노동으로 만들어버린 것 만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중학교때부터 봐오던 엄마의 바지 끝이 너덜너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며 기어 입는 엄마의 모습만 떠오르고. 결국 엄마에게 아무것도 해 준게 없는 것 만 같아서 미안하면서 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삶을 선택한 엄마에게 나도 모르는 답답함도 느껴보고. 엄마한테 쓴 편지를 결국 전해주지 못하고 또 그렇게 서랍에 넣어놓게 되었다.
그날 밤 “엄마 수고했고 너무 고마워. 비행기 타면 꼭 푹 자. 꼭 쉬어. 푹 쉬어.” 하며 지난 7년과 같은 헤어짐을 하고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그 어느때보다도 너무나 무거웠고 괜시리 더 섭섭하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왜 이렇게 슬프나. 벌써 외롭나. 고요함이 늘 익숙하던 나인데 왜 오늘은 이 고요함과 공허함이 가슴 시리게 아플까. 남자친구가 없으니 하다하다 이제 엄마한테 집착하는 건가. 연애를 해야하는 시기인가 하며 이 눈물을 괜시리 쓸데 없는 핑계로 덮어보려 했으나 오래 가지 않아 또 엄마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비행기 기다린다며 전화 오는 엄마는 코막힌 내 목소리를 바로 알아채고 무슨일이 있냐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높이면 무얼하나. 24년동안 변함 없는 어색한 나의 연기 스킬과 거짓말을 보고 듣고 또 혼내왔던 엄마인데. 아무리 능숙한 척 해보려 해도 나는 엄마 손 안에 있는 엄마 딸인데. 은근슬쩍 솔직한 내 마음을 내비추려 “엄마한테 너무 고마워서. 이번에는 그냥 눈물이 나네. 다른때랑 달라. 엄마 가니까 너무 허전하고 보고싶어.” 말했지만 엄마는 앞서는 걱정된 마음을 추체체 못하고 또 추궁에 들어간다. “너 혹시 안좋은 일 있니? 엄마한테 솔직하게 이야기 해도되. 엄마한테 빨리 이야기 해. 엄마 이해해.” 이거 일이 너무 커지겠다 싶기도 하도 나도 모르게 이건 아니다 싶어 “엄마 제발. 나 진짜 아무일도 없어. 정말 엄마한테 고마워서 그러는거야. 내가 늙었나봐” 하며 엄마를 설득하고 이번에는 오해말라며 말하고 또 말하고 그렇게 진정 시켜서 떠나보냈다. 그리고 한달 후 나는 내가 유난히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그 날 밤이 내게 하려 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뉴욕에서의 내 삶은 그렇게 의도치 않는 휴식기에 접어들었고 7년간의 엄마가 뉴욕으로 나를 보러 오는 일 역시 당분간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가슴아팠을까.. 밤새 울고 또 울고 뜨기도 힘들게 부어버린 눈이 버거워서 머리도 너무 아파서 다음날 침대에서 꼼짝 않고 있어야만했는데. 그렇게 힘들고 버거웠던 밤이지만 내가 그만큼 가슴아리고 그립고 무겁고 그리움 역시 한켠에 차지하고 있는 엄마의 사랑의 한 부분을 아주 조금이라도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알게 되어서 감사했다.
내게는 가장 가깝고 또 가장 가슴 아린 한사람 엄마. 엄마한테 이런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잠시 내 삶의 핸들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였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혹은 미리 계획되어있었을 수 도 있는) 변화를 선택 한 나는 한동안 지독하게 괴롭혔던 감정적인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음악인으로써 사명감과 감사함 또 내 삶의 비전을 부여받았기에 뒤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선택하고 과감하게 7년만의 한국에서의 여름 또한 결정하고, 압구정 우리집에서의 여름 불청객이 되어야겠다는 나의 다짐이 가족들에게는 많이 불편했을 것 같아서 미안했다. 죄책감도 들고 미안함도 들면서도 나는 그렇게 주위의 눈치를 보며 7년만에 처음으로 아빠, 오빠, 그리고 엄마와의 여름을 보냈다. 매일 매일을 마주했고, 행복했다. 행복함을 매일매일 마주하면서 피할 수 없었던 한가지는 그만큼 매일매일을 마주해야하는 불화였다. 뉴욕에서 혼자 지낸지 7년. 서로의 모습을 못 본 시간 역시 7년. 아빠와 오빠 역시 오랜만에 긴 시간을 나와 보내는게 그리 쉽지 않았을 것 이다. 뉴욕에 있을때는 방학때나 잠깐 한국에 나와서 짧은 시간 만을 서로 보고,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서로에게 좋은 모습 보이기에 바빴고 웃어주고 보듬어주기에도 주어진 시간이 늘 모자랐기에 서로서로 행복하게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가져왔는데.. 오랜만에 함께 살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매일을 서로를 보며 크고 작은 마찰도 보게된다. 바쁜 와중에도 주말에 가족과 함께하는 외식도 좋아하고 항상 빠르고 건강하고 생기있는 딸바보인 우리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굳게 닫힌 방 문 너머로 들려오는 꽉 찬 음악 소리에 더 익숙해져버린 아빠를 보게 되었고. 가족들 눈 마주치는게 어색한지 방에 들어갈때는 늘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며 혼잣말을 해대고. 예전에는 아끼고 또 아꼈던 나를 향한 잔소리도 어마어마하게 늘었고. 맘에 들지 않는 것 도 많아지고. 엄마한테는 더 없이 차가워지고. 목소리는 커지고.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았고. 이런 아빠의 변화에 나는 적응 할 수 없었다. 미안하면서도 눈치보이고. 또 괜시리 어색해서 내 말 수 조차도 줄어들게 된다. 엄마 몰래 용돈을 주시려고 조용히 내 방 문을 열고 현금을 쥐어주는 아빠가 고마우면서도 그냥 그 돈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 더 많았다. 이 돈 보다는 그냥 따뜻함이 더 간절했기에. 내가 너무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아빠의 변화에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응원하고 도와주고 외롭지 않게 함께 하고 기도해야하는데, 왜 나는 이 모든게 실망스러울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다. 축 내려앉은 아빠의 어깨가 지하철에서 보는 흔한 50대 아저씨들의 어깨와도 같아보여서 놀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슈펴맨 우리아빠도 사람들 눈에는 그저 아저씨구나. 그 흔한 아저씨이겠구나 . 그 흔한 아버지이겠구나. 광고에서 보는 축 처진 아버지들의 어깨가 바로 우리 아빠의 어깨와도 같구나. 지나가는 남성 갱년기 광고를 무심코 쳐다보면서 쓰여진 단어들 (우울함, 만성피로, 무기력, 의욕저하) 이 우리 아빠를 그려냄에 또 깜짝 놀라고 가슴도 먹먹하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슈퍼맨 아빠가 세월의 바람을 맞는 그동안 나는 우리 아빠가 에게 무얼했나 하는 생각을 하자 또 미안함이 앞서고 볼에 열이 돋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바껴버린 집안 공기에 숨 쉬기도 힘들고 미안함이 마음으로 짓누르고 이 모든 변화들을 적응하기도 바쁜 와중 또한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건 또 엄마. 엄마. 엄마. 아무것도 없는 우리 엄마.
한국에 돌아와서 Tel Aviv 대학원으로 간다는 내 최종 결정에 두려우면서도 지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곤란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래도 웃자며 엄마를 부추겼고 엄마는 또 그렇게 나를 돕고 나를 지지하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 주위에서는 이런 변화를 심상치 않게 여기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연락을 받는 엄마가 잠 못 이루고 걱정하는 모습을 매일매일 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엔 유난스럽게만 보이는 걱정들과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 나는 그런 이야기들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만 우리 엄마는 다르다. 특히나 나의 일에 있어서는. 그래서 더 걱정하고 잠도 못자고 기도하고 잠든 나를 깨워 또 걱정하고. 엄마가 꽤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게 가슴이 아팠다. 25살이지만 다 큰 성인이지만 엄마에게는 아기였나보다. 정말 어린 아기였나보다. 나를 또 낯선 곳으로 떠나보내야함이 두려웠나보다. 좋은건지 안좋은건지 모르겠다만 생긴 거에 비해 자립심과 모험심이 강하고 또 간절한 나이기에 주어진 새로운 변화를 무덤덤히 받아들이면서도 엄마의 걱정이 계속 신경쓰였다. 내 걱정하느랴 오빠 걱정 하느랴 아빠 걱정하느랴. 내 기도하느랴 오빠 기도하느랴 아빠 기도하느랴 내 밥 챙기느랴 오빠 밥 챙기느랴 아빠 밥 챙기느랴. 내 빨래 하느랴 오빠 빨래 하느랴 아빠 빨래 하느랴.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보인다. 세상 걱정을 다 등에 엎고 보여지는것이라곤 손에 쥐어진건 굳은살 뿐. 하지만 그 속에서 고스란히 피어난 굳건한 기도와 믿음. 미국에서 그렇게 나를 가슴아프게 했던, 허나 잠시동안 잊고 있었던 당연히 여겨지는 “엄마가 하는 일”을 또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시간동안 “엄마가 하는 일” 과 또 엄마의 걱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조금은 버거웠는지 아니면 또 깨질 것 만 같은 유리마음을 흔들어놓았는지 몰라도 이런 모든 현상들이 내 때 늦은 반항기에 시작을 알렸던 것 같다.
20여년간 엄마의 일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0대 때 내가 이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때와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시간의 감정이 현저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엄마가 늘상 이야기 하는 “당연한 엄마의 일”에 고단함이 짙게 묻어난다. 왜 나는 지금에서야 이렇게 엄마이 고단함을 느끼게 되는건지.. 사실 엄마의 삶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을 예나 지금이나 같다. 다른 자식들과 같이,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엄마에게 해주고 싶다. 단순한 발언일지 몰라도 좋은 삶을 선물하고 싶기도 하다. 10대때의 무능력함을 20대때는 무조건 갚아보겠다는 자만 섞인 의지와 소망이 물거품과 같이 보이는 순간이다. 내가 아무리 엄마에게 “좋은 것”을 선사하려 해도 엄마의 짙어진 먼지 묻은 손 끝 과 거뭇해진 무릎팍은 그 어떠한 “좋은 것” 과도 바꿀 수 없다. 엄마는 늘 변함 없이 착하다. 내 엄마라서 그런것일까. 정말 착하고 선하다. 그 착함이 옛날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화가나기도 하다. 10대때는 우리엄마 착하다 생각뿐이였는데 지금은 왜 저렇게 바보같이 아무말 않고 있을까 한다. 10대때는 엄마가 치맛바람이 귀찮은면서도 항상 그 차맛자락을 꼬옥 잡고 함께 갔는데 지금은 그런 엄마의 노력이 나를 화나게도 한다. 엄마는 왜 계속 고단해야할까. 나는 정말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 방법을 묻노라면 늘 이야기 한다 “너 잘되는게 엄마 행복한거야.” 내게는 “잘되는” 의미가 너무 크다. 아직도 “잘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 도 많고 여러가지 일에 의심도 많은 부족한 내가 엄마에게 큰 행복을 선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 만 같아서 또 미안하다. 의지는 불타오르지만 의심은 여지 없이 그 자리에 있다. 간절함은 하늘을 솟구쳤지만 두려움 역시 변함 없이 내 마음을 휘젓는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착한 딸 말고 가끔은 능력있는 딸 되고 싶은데. 다른 이들 다 원하고 다 바라는 그런 것 나 역시 꿈꾸고 있고 간절한데. 그렇게 우리 엄마 아빠 웃는것만 보고싶은데. 엄마 아빠 딸 덕에 웃게 하고 싶은데 정작 나는 턱 없이 부족하고 참 바보 같이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내 자신을 원망하고 그 원망의 화살이 착한 엄마와 눈치 보는 아빠에게로 간다. 왜 나를 착하게 엄마 아빠 말 만 들으며 살라 했냐는 원망만 한다. 말도 안되게. 정말 앞뒤도 맞지 않게. 어느새 나는 그렇게 원망이 끊임 없이 흘러 내렸다. 원망이 분노를 불렀고 나만의 사춘기가 성난 파도와 같이 나를 흔든다. 뭐.. 사실 엄마 아빠 두 분 다 내가 “반항기”를 겼었다고 생각 못하셨을 것 이다.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그냥 웃고 말았으니까. 내가 하는 원망은 고작 방음 되어있는 피아노 방 안에서 우는게 다였으니까. 말도 안되는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나님한테 불평도 했다. 나 왜 이렇게 무능력하게 만드셨냐고. 착하게 살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는데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더 힘든거냐고. 손이 부러졌을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손이 다쳤을때 피아노를 그만두게 하시고 일찍이 다른 일 하게 하셨으면 최소한 돈이라도 벌면서 내 밥벌이는 하고 있지 않았을꺼라며. 나 아니였으면 우리 부모님 더 행복했을꺼라는 확신 또 확신하며 내가 피아노 한것처럼 공부했다면 뭐라도 했을꺼라면서. 떵떵거리며 잘난척도 해봤다. 그러면서 또 원망은 끊임 없었다. 세상이 원하는 건 하나님이 원하시는거랑 너무 다르다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 말 만 들었다가는 이도저도 안되겠다는 원망을 해댔다. 그 와중에 고요하시고 또 고요하시면서도 변함없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어린 아이마냥 생 난리를 치고 원망을 하다하다 울고 또 울다 지쳐 내 마음에 분노가 먼저 누워버렸다. “하나님이 이겼어요. ” 그러고 다시 바라봤을때도 부모님은 변함없다. 상황이 변한 것도 아니다. 나아진 것 도 없다.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이다. 감사하다. 이 상황에서 내 원망섞인 반항이 땅으로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렇게도 매섭게 치던 파도와도 같았는데. 지금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만 같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멋쩍지만 그냥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렇다. 바뀐건 없다. 나는 뉴욕에서의 생활을 잠깐 접고 이스라엘로 간다. 더 철저한 사람들과 공부하러 간다. 새로움을 경험하러 떠난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세상을 배우고 그 역사를 경험하는 특혜를 누리러 간다. 이전 삶에서 생각지 못한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나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긴장되고 또 행복하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나의 “내일”이 나의 “오늘”이 되었다. 손이 다쳤던 3년 전 피아노를 그렇게도 그만두고 싶어했고 내 “내일”에 피아노가 없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어리석음이였음을 깨닫고 지금 그때의 그 “내일”이 피아노가 함께 하는 “오늘”이 되었음을 감사한다. 가끔씩 듣는 질문과도 같이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지금 이 자리까지 왔냐고 묻는다면 그냥 어쩌다보니 이렇게 음악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어쩌다보니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렇게도 그만 둘 법 도 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흔들리지 않는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에 피어난 작은 소망을 맘껏 펼치게 해준 부모님과 하나뿐인 사랑하는 오빠의 희생과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 그들의 기도와 그 기도를 보고 배운 내 어리숙함 가득한 소망 있었고, 고단함과 어려움을 나누며 함께 연습하고 연주했던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고, 또 이 모든걸 허락해주신 그 분이 계신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많은 것을 선물받고 살아왔고 여기까지 왔다. 그냥 온 것 같지만. 정말 이런 저런 일 들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이런 저런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또 나는 그런 감정들과 생각에 반응하고 조금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걷고 있다.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다. 단순함 보다는 정답 없는 대화라도 길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소유하려는 성격이다보니 빠른 길을 걷지는 못했다. 화려함에는 어색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혼자만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크고 밝은 사람이다. 주목 받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주위 사람들 웃기는 것 을 참 좋아한다. 편한 것 도 좋아하지만 편함 보다는 조금 불편하고 외롭다 하더라고 극복하는 것 을 매우 좋아한다. 예쁜 사람들을 한 없이 부러워하면서 정작 내가 예뻐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하루 종일을 나는 왜이럴까 생각도 하다가 나름대로 쿨하게 넘기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고고한 아름다움을 알게 모르게 찬양하면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강조한다. 사실. 둘 다 잡기 힘듦을 몸소 느낀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화려함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탐나지 않는다. 심지가 굳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잘하는 사람도 좋지만.. 열심히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누군가에게 대접 받는 방법도 모르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영 어색하기도 하다. 내 자신을 세우고 표현하는 것이 영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 눈 속에 보이는 나는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상상 그 이상의 소망이 있다. 이 소망과 생각, 기도, 감정, 그리고 이야기가 내 음악을 통해 전해지길 간절하게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음악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오랜 전 이런 아름다운 곡들을 쓰고 떠난 작곡가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들의 음악이 어쩌면 내게는 소통의 통로이기때문이다. 누군가의 음악이 또 삶이 내 소통의 통로로 함께해주는 것에 대해 가끔은 부담스러움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가장 나일 수 있는 그 시간이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임을 안다. 어렸을적부터 내 음악이 사람들에게 치유가 되는 음악이 되길 기도해왔다. 꽤 오랜시간 기도해왔다. 아베스의 기도를 읽고 또 읽으면서 연약함을 딛고 지경을 넓힌 야베스의 기도가 내 삶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기도해왔다. 삶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고,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음악이 치유가 깃든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되길 기도한다. 야베스의 어머니가 수고로 그를 낳았듯 우리 엄마 역시 나를 수고로 낳으셨고 나를 위해 기도했으니 나 역시 그와 같은 고백이 나오길 기도한다.
가끔씩 꿈꾸게 되는 화려함과 매일매일의 물질적 풍족은 잠깐 접고 조금 더 낮은 곳 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삶에 묻어나게 될 겸손함을 배우게 하심에 감사한다. 예의 있는 자의 자세를 넘어서 겸손하고 배려하고 낮은 마음을 배우게 하심을 감사한다. 무엇보다 음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음악이 사랑과 자유함이 전에 곧 육체의 연단임을 다시 한번 경험 하는 내 삶이 되길 바란다. 내 마음을 연단시키듯 부단히 연습하고 또 배우고 싶다. 다사다난 했던 한 해 였고, 여자로써, 딸로써, 음악가로써 참 많은 변화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마음 속에 품었던 또 다른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였다.
가족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결혼 30주년을 2년 앞두고 계신 부모님의 삶에서 내가 행복을 드리길 소망한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드리고 싶은 만큼 드릴 수 없고 또 많이 부족한 나 이지만 그래도 두 분의 삶의 모습을 잊지 않고 항상 헤아리며 감사하며 기도하고 사랑을 표현해야겠다. 하나뿐인 사랑하는 우리 오빠도 내게는 버팀목이고 소중한 동반자이다. 내 삶을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았던 또 다른 희생자라고 생각해오고 미안해왔지만 나로 인한 희생이 아닌 오빠가 주인공인 그 삶에서 어려움을 버티고 매일매일의 선함과 이해로 일구어낸 자랑스럽고 한없이 멋진 우리오빠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또 자랑스럽다. 동생이 항상 오빠의 존재를 잊지 않고 늘 오빠 생각을 한다는거 알고 있으면 좋겠다. 더 큰 바램은 오빠가 지니고 있는 삶의 무게 또한 함께 지고 나가는 동생이고 싶다.
뉴욕에 소중한 인연들과 2년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 보고싶어서 이번 여름에도 혼났다. 소중한 친구 푸름이에게 여름 끝자락에 연락해서 보고싶다고 나 제발 잊지말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혼자 메세지를 보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너무 보고싶었으니까. 나를 잊으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도 있었다. 갑자기 또 왜 이러냐며 왜 또 이런 긴 글을 보내냐며 나를 달래는 쿨한 푸름이의 대답에 어린 아이 마냥 한숨을 몰아쉬며 안심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남자 친구가 없으니 푸름이한테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나도 보고싶다. Charlotte도 많이 보고싶다. 승연이도, 희진이도, 새롬이도, 선영언니도.. 대학 다니면서 유일하게 잘 연락하고 기도도 많이 했던 Dan도 보고싶고, 내가 사랑 받고 있음을 매 순간만다 보여준 Joy랑 Betty도 보고싶다. TLC 언니 오빠들도 보고싶다. Veda도 너무 그립다. Rachel , Alex도 보고싶다. 이렇게 이들의 이름을 읊으며 한사람한사람을 위해 기도해본다.
내 삶에 생겨나 새로운 문을 열기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괜시리 청승맞아진다. 감사한 것 도 나열하고 싶고 이런 저런 목표도 외쳐보고 싶지만 마음속에 품으련다.
성숙한 여성이 되기를 다시 한번 기도하고 또 다짐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발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도한다. 소통을 막는 이가 아닌 소통을 건네는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