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Schäfer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글을 쓰라 하셨다. 글을 다루는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의 삶의 경험을 언제나 기억하고 가슴 속 에 새기라고. 그렇게 어린아이 시절부터 이곳저곳에 글을 끄적이는 습관을 들이던 나에게 어느순간 글을 쓰는 것 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잊고 싶은 기억을 또 마주하는 것 이 두려웠고, 시간이 흘러 읽었을때 흐려져가던 기억과 용서되지 않던 순간들에 다시 나를 가두어 마치 내 두손에 족쇄를 채우는 것 만 같았다. 오롯이 나의 입장만을 앞세웠던, 오롯이 나의 이야기만을 적어 내려갔던. 다른 이들의 시선과 사실을 묵인한채 나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써 내려갔던 수 많은 글들에 대한 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글 쓰기를 멈춘지 1년이 가까워오자 잠시나마 자유를 누렸던 나의 삶 한켠이 공허했다.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살기에는 아쉬움이 적지 않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이제는 글을 쓸 때 귀하게 기쁜 순간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싶다. 고독을 즐기던, 혼자만의 시간에 깊이 심취하며, 일방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기울어 토해내듯 적어 내려갔던 습관을 내려놓고, 조금은 담백하지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글을 적어내려가려 한다.

다시 써내려가는 글의 주인공은 바로 독일에서의 5년의 시간을 늘 함께 해주신 Michael Schäfer교수님이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다 적어내려가기에는 부족한 공간이지만, 그를 통하여 내가 배워나간 여러가지 일화들을 기록한다.  내가 기억하고 존중해야할 한 사람에 대한 메모를 남겨본다.

나의 교수님이자 멘토, Michael Schäfer.  첫 만남은 그저 어려운 독일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에게도 나는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동양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2015년 12월 그를 만나 밋밋하게 시작된 레슨을 떠올린다. 미세한 웃음 뒤에 느껴지는 그와 나의 거리는 내가 독일을 대하는 방어적인 자세와 같을 지 도 모른다. 선생님은 나를 알려하기 보다 나의 음악을 진단하는 의사 선생님과도 같았다. 이런 병이 있었다. 이런 습관이 나의 병을 야기 시킨 것 만 같다. 마치 신체검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하여 선보이는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와 바하 평균율을 듣고 진단을 시작하는 의사 선생님 앞 에서 나는 숨죽여 그의 답을 기다렸다. 모든것을 빼기를 바라셨다. 페달도, 억지로 욱여 넣는 듯 한 감정도, 어깨를 짖누르는 힘도, 그저 모든 것 을 빼고 멀리서 음악만을 하기를 바라셨다. 별 다른 개인적인 정보 교환 없이 음악적 사실을 기반으로 두시간의 레슨이 이어졌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적지 않게 땀을 흘리고 나왔다. 독일 사람에게 진단받는 그 첫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선생님은 하루하루 레슨이 끝날때 에 맞춰 나에게 눈 인사를 건네셨고, 5개월의 시간을 그렇게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다채로운 음악의 결은 쉴새 없이 쌓였다. 마치 “건강해지려면 이거 드시지 마세요. 저거 드시지 마세요. 담배를 끊으세요“ 말씀하시는 의사선생님과 함께 점점 좋아지는 경과에 작은 희망을 마주하고 간절함 가운데 정상 수치에 도달하기 위해 안해보는 노력 없는 환자와도 같았다.  물론 아직도 중증환자이다.

그렇게 오디션을 합격하였고, 여름이 지나 완전히 달라진 나의 삶. 나의 가장 빛나던 시절에 자유를 선물해준 교수님과의 시간은 매순간 너무나도 귀했다. 음악을 통해 일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넘치는 자유함을 느끼는 세상을 마주하였다. 공식적인 선생님과 제자로 새로이 시작된 첫 레슨에서 첫 악수를 건네셨다. 5개월만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그와 나의 거리에 기쁨을 느꼈다. 뿌옇고 밋밋한 독일의 삶 속 에서 반짝반짝 별이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키우던 유일한 순간이다.  나는 가급적이면 매주 월요일 가장 첫 타임으로 레슨을 잡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게 편한 사람이라서가 아닌, 그저 새로이 시작되는 일주일의 가장 처음 나의 음악을 선보이고 싶었다. 8시에 레슨실을 열고 선생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오랜시간이 지나도 늘 긴장 되었지만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10시 시작되는 2시간 남짓 되는 레슨은 내 삶의 루틴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대학시절 나의 레슨 시간은 매주 월요일 9시였다. 그 시간이 오는게 두려워 주말 내내 눈물을 쏟고 8시 50분까지 벌벌 떨다 학교로 뛰어갔다. 월요병인지 아니면 그냥.. 두려움에서 오던 고질적 눈물병인지 몰라도 그렇게 월요일 아침이 무서웠던 나는 어느새 월요일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월요일의 아침레슨이 끝난 날 은 두근대는 가슴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치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잠 못 이루는 아이와 같았다.  음악만을 생각하게 해준 교수님이다. 음악이 나의 몸이라면, 망가진 나의 몸을 진단하고, 영양제를 추천 받고, 가끔 입원도 하고 대수술도 받아가며 건강한 음악인의 길을 걷게 해준 은인이다.

2018년 선생님이 교직에 서신지 28년이 되는 해 였기에, 우리 클래스는 모든 작곡가들의 op. 28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모아 연주를 준비하였다. 내가 연주한 Schumann Romanzen op. 28은 내 삶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적합한 곡 이었다. 나의 넘쳐나는 감정이 혹여나 연주에 집중하려는 관객에게 방해되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러운 방법을 시도하며 연주했었다. 슈만의 삶을 다시 바라보며 그저 그의 작품을 전달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나에게 3년째 되는 해에 선생님은 더 큰 울타리를 내어주셨다. 미국과 유럽 이곳저곳 원서를 넣으며 돌파구를 찾던 중,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대화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길게 내 뱉었던 푸념이었다. 끝 없이 이어지는 나의 걱정에 선생님은  “지금 이 길에서의 결정은 온전한 너의 몫”이라며 그 결정이 어떤 결정이던 존중받아야 마땅할 것 이라며 인간적인 의리를 보여주셨다.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에 위궤양이 생기고, 6-7 kg이 빠졌을때도 단 한번의 레슨도 취소하지 않고 갔다. 내 현실적인 걱정은 선생님과의 한번의 대화로 이미 충분했었기에, 내 삶이 잠깐 어지럽더라도 음악을 배우는 것 까지 멈추고 싶지 않았다. 힘이 없더라고, 꼭 한 곡은 어떻게든 배우고 나오려 했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절대 피아노 뚜껑을 혼자 열게 하지 않으신다. 내가 살이 포동포동 오른 그 후에도 늘 뚜껑 열고 닫는 것 은 선생님의 몫이었다. 아직까지도 “밥 챙겨먹었니?“ 가 가장 첫 인사이다.

선생님과 함께 긴 여행을 다녀온 것 만 같다. 새로운 레파토아와 숨겨진 곡을 찾아 연주에 올리는게 즐거웠고 어느날은 Diabelli variation 과 pair 할 수 있는 현대곡까지 가져다주셨다. 작곡가의 의도를 해석하기에 넘어서서 독일 문학의 이해를 돕기위해 어떤 자료던 가져다 주셨다. 허름한 가방 안에서 꺼내오신 두꺼운 악보들을 건네 받고 쉴새 없이 읽어내려갔다. 가끔은 너무 실험적이라 피하고 싶은 곡도 있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공부한 곡들이 너무 귀했고 또 좋았다. “나이가 조금 있는 학생“ 이었기에 그런 나의 자리를 배려해주셨고, 음악 안 에서는 나라는 사람을 잊고 음악을 공유 해주셨다.  곡을 정하는데에 있어서, 콩쿨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항상 실험적으로 공부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작품들을 추천해주셨다. 임상실험과도 같은 것.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소한 곡의 겉과 속 마저 다 뚫고 계셨다. 선생님의 이메일 속 에 여러가지 다른 스타일의 곡이 추천 되어있고, 그 중 에 나를 이끄는 곡을 골라 배웠다. 그 즐거움으로 나는 집에서 이런저런 곡 을 찾아 듣기도 하였고, 악보 파는 곳으로 가 생소한 악보를 꺼내 골라 보기도 하였다. Schubert-Liszt transcription이 너무 많이 연주되기에 조금 다른 느낌의 곡을 찾고 싶었다. 선생님에게 Godoswsky Passacaglia에 대한 곡을 물었을때 단번에 “엄청 재미있겠다. 악보 있어? 줘봐.“ 하며 아직 나는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 곡을 쳐 내려가셨다. 이부분은 이렇게 해야겠다, 저 부분은 저렇게 해야겠다 하며 나에게 수많은 음표들로 밑그림을 그려주시던 어깨가 생각이 난다.

간절한 순간에도 선생님은 늘 평정심을 잃지 않으신다. 걱정말라는 안위는 주시지 않고 말을 극도로 아끼신다. 결과에 대한 모든 말을 아끼시고, 나 역시 그에 관한 그 어떤 것 도 묻지 않는 것  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묵묵히 조바심과 걱정을 감춰오고 살았고, 말을 아끼는 법을 수련하는 과정 속 에서 결과 또한 늘 나쁘지 않았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어떠한 상황 속 에서도 참고 기다리고 내 할일을 하는 방법을 배웠음에 감사하다.

선생님은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셨고, 응원해주셨다. 2020년 겨울, 미국 학교들에 원서를 넣으며 추천서를 부탁 드렸던 적 이 있다. 학교에 원서를 넣을때 추천서 내용은 보통 추천교수측의 비공개로 제출 된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추천서를 보냈는데 너무 길다고 생각하니?” 하며 이메일로 보내주셨다. 어쩔 수 없이 A4용지 꽉 채워진 추천서를 읽어보게 되었다. 선생님과 4년을 공부하며 나는 단 한번도 선생님이 나의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랐고, 늘 실수에 절절매는 나를 보며 소리없이 끅끅 웃으시던 모습만 기억한다. 물론 “추천서”이기 때문에 칭찬을 더 얹어주셨을 수 도 있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그저 음악이 좋은 나를 멋진 음악가로 평가해준 선생님의 긴 글에 괜시리 민망하고 감사하고 또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님의 사랑은 절제되어있다. 존중이 있고 선이 있다. 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넘쳐 흐르는 기쁨이 있고 기괴함도 있으며 기품이 있다. 한 없는 멋과 삶의 지혜도 있다. 나는 그런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선생님은 나를 기다려주셨다. 항상 한발자국 앞에서  걸어가시며 내가 따라오도록 살펴주셨다. 손을 내밀어 끌거나 뒤에서 등을 떠밀지도 않으셨다. 그저 한발자국 앞서 걸으시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다. 내가 두발로 온전케 걸을 수 있을때까지 그 속도를 늘 함께 걸어주셨다. 꽤나 느렸을텐데..  꽤나 답답했을텐데.. 감사하다.. 선생님을 두고 독일을 떠난다고 내 길을 정했을때는 많이 슬펐다. 혼자 몇달을 울먹였는지 모른다. 미국을 돌아가려면 내 욕심으로 선생님을 잡을 수 없었기에 나는 과감히 독일의 모든 것 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한동안은 죄책감으로 선생님께 연락 또한 제대로 못했다.

내 삶에 만남의 축복을 위해 수 없이 기도해왔다.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된 나의 기도에 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성장하고, 아팠고,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나의 삶의 곳곳에 함께 해준 많은 이들이라 관계의 상관없이 감사하다. 선생님은… 내가 가장 반짝일수 있도록 밝혀주신 하늘같은 사람이다. 차가웠던 뮌헨에서 가장 뜨거웠으며 가장 반짝일수 있도록 넓은 하늘의 마음으로 감싸 안고 나의 자리를 밝혀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의 시간이 여기서 끝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내가 선생님처럼 되었을때, 그 깊이를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별처럼 빛날 수 있는 밤하늘이 되어주시고 잠시 쉴수 있는 햇빛이 되어주시던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의 고군부투 독일에서의 삶을 지켜봐준 선생님께 감사할 뿐 이다.

배짝 마른 몸, 길고 긴 팔다리, 구부정한 어깨. 나에게는 Joaquin Phoenix 보다 멋지고 그 이상의 예술을 품어내고 persistent 의 example을 보여주신 분이다. 들쑥날쑥했던 나의 삶에도 평범한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저울위의 추의 무게와도 같던 선생님과의 시간. 덕분에 가끔씩 찾아오던 정체기도 꽤나 안전하게 넘길 수 있었고, 참다참다 다 터져서 내려놓은 날 역시 툭툭털고 일어나라며 무심히 용기 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 덕분에 의연해지는 법을 배웠고, 내 인생의 굵직한 결정도 내렸으며, 삶의 가장 첫 날처럼 풋풋하게 하루를 살아나가는 지혜도 배웠다. 앞으로도 나의 부족함은 끝이 없겠지만 형편없는 내 모습 조차도 존중해주시고 책임감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뮌헨에서의 마지막 독주회에서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감사한 마음을 전할까 싶어 무대 위 에서 용기를 갖고 목소리를 내었다. 은퇴를 한 해 앞둔 선생님께 내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인사였다. 감사 편지를 읽어 내려간 후 선생님이 너무 민망해하시지는 않을까 염려 되어, 학교 다니는 동안 도와주셨던 다른 교수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하였다.. 뉴욕으로 이사 가게 되면 예전처럼 자주 만나거나 함께 연주 하는 기회가 없어지더라도, 음악을 사랑하고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자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이 귀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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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 habe wie ein Wanderer in verschiedenen Städten auf Zeit gewohnt.

Als ich vor , fünf Jahren hierher gekommen war, fühlte ich mich unsicher.

Nicht nur meinem Leben gegenüber, sondern auch auf der Bühne.

So habe ich mich immer wieder gefragt ob ich bereit bin, mich wieder anzupassen.

 

Obwohl Musik meine Leidenschaft ist, sah die Realität anders aus.

Ich habe mich Tag und Nacht mit meinen musikalischen Fähigkeiten auseinandergesetzt und die Auseinandersetzung hat mich nicht in Ruhe gelassen.

Der Übungsraum 227 war der einzige Ort, wo ich mich frei fühlen konnte.

Da konnte ich mit Herr Professor Schafer verschiedene Musik spielen und die Musik öffnete mich die Tür zu einer neuen Welt.

Deswegen habe ich mich immer auf diese zeit gefreut und es sehr zu schätzen gewusst.

Die Zeit hat meine Seele geheilt. Und die Zeit hat mich nicht nur zu einem besseren Menschen gemacht, sondern auch zu einer besseren Pianistin.

 

Am Klavier konnte ich mich frei ausdrucken.

Hierfür möchte ich besonders Herr Professor Schäfer von ganzen Herzen Danken.

Ohne sein Vertrauen und seine Geduld wäre es nicht möglich gewesen, meine musikalischen Fähigkeiten zu vertiefen.

In der dunkelsten Zeit meines Lebens hat mein Studium begonnen, aber ich beende mein Studium in der schönsten Zeit meines Lebens.

Auch möchte ich mich bei allen anderen Dozentinnen und Dozenten bedanken.

Sie alle waren immer ausbauend. Sie haben mich motiviert und mir neuen Mut gegeben.

Nach einer langen Überlegung habe ich mich entschlossen, München zu verlassen und einen Schritt in eine neue Zukunft zu machen.  Sie haben mir Hoffnung gegeben, dass ich eine inspirierende werden kann, die leidenschaftlich Musik liebt.

Ich werde mich lange an sie erinnern.

Vielen Dank.

SUNMI HAN 27. JUNI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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